옛 시디백업을 정리하다가 본 글이다.
사람은 중학생 나이가 되면 글을 반듯하게 쓰는 정도로는 어른과 구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 같다. 저 글이 내가 중학생때 쓴 글은 아니지만, 나도 그랬던 것 같아서.
옮겨적는다.
1998. 6.25.
지도자 평가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었다.
그가 이끌고 나간 팀이 크게 졌다는 이유다.
팀을 이끌고 나갔고 지고 돌아왔고 보낸 사람들이 실망했 으니 경질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를 평가하는 데 있어 사람들은 이성적이지 않은 이유를 댄다.
지도자를 선발했다. 되고 싶어 한 사람도 있고 의무감만으로 한 사람도 있었다. 그를 내보내 일을 시켰다. 그리고 그가 일을 했다. 그리고 평가를 한다.
리더란 무엇인가? 리더를 꿈꾸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의 카리스마아래 모이는 쫄따구를 몰고 저 언덕 위 목표를 향해 뛰는 자신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돌들의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관심한 대학사회에서도 그것은 어쩌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사회에서는..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그 이유를 말하고싶다.
1. 얼굴없는 세력이 많다. 그들은 리더를 그들의 장갑(armer) 정도로 여긴다. 리더가 그들의 일을 대신 하기 바라며 그들의 비난을 대신 받기 바란다. 많은 경우 리더는 배경세력에 치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다. 많은 경우, 재력과 연배는 배경세력의 무기다.
2. 리더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 공식/비공식적인 체제는 리더에게 모든 결정권을 맡긴다. 실질적으로 그 모든 일을 리더가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리더는 책임을 진다. 일은 리더의 의도와 상관 없이 그 아래 숨은 사람들이 한다. 권리와 책임의 구분은 공식/비공식의 잣대로 나눌 게 아니라 제도적/문화적 기준의 잣대로 나눠져야 한다. 그리고 리더의 저항은 그것이 리더의 권한에 속한 경우 제도의 틀 안에서 용인되어야 한다.
3. 리더가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똥을 뺀 부처가 아니다. 그점을 부인하는 사회에서 리더는 영삼이만큼이나 형식적인 사람이 되거나 김일성만큼 전제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즉 책임질 수 없거나 책임지지 않는다. 민주주의사회는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다.
4. 리더의 능력부재다. 그것은 원초적 문제다. 제대로 된 리더를 본보기로 삼지 못한 싹이 커서 제대로 된 리더가 되기 힘들다. 그것은 정말 원리적 문제다. 순수한 제 1대는 자력으로 커야 한다. media 중 어디에 본받을 만한 제 1대가 있을지는 모르므로 그들은 모든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계발동안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비스마르크도 좋지만, 나는 사람도 되고 싶다. 이런 제한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어떤 조직의 리더로 살아갈 것을 예감하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차범근 감독. 그는 할 만큼 했다. 언제나, 영악하지 않은
지도자는 그랬다.
(*)
16년이 지난 지금, 동의하냐고? 글쎄. 그냥 멋지게 보이려고 써놓은 글일 수도 있다. (물론, 당시 차감독이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나는 조직의 리더가 아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글이 엉망이군. ㅎㅎ
저것은 블로그가 없던 시절에 쓴 글이다. 이 블로그가 16년간 살아남는다면, 그 때 내가 여기 쓴 글을 보게 되다면, 미래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쓴웃음을 지을까.
ps. txt파일 타임스탬프가 맞나 궁금해서 98년 월드컵 일정을 찾아보았다. 네덜란드에 5:0으로 지고 며칠 뒤, 벨기에 경기날 적은 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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